2026-06-14·Sanchez

문화 속 토끼, 그리고 '토끼굴'의 유래 — 굴 세 개의 출처

토끼는 오래전부터 이야기 속 단골손님이었어요.
같은 토끼인데 문화마다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

동아시아에서는 달을 올려다보며 토끼를 떠올렸어요.
달 표면의 무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를 본 거죠.
한국·중국·일본이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달에 토끼가 산다는 상상은 널리 공유됩니다.
십이지에도 토끼(묘)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요.

서양에서는 봄의 상징으로 토끼를 꼽았어요.
부활절마다 등장하는 토끼는 새 생명과 풍요를 뜻합니다.
토끼가 새끼를 많이 낳는 데서 온 상상이죠.

그리고 이 게임의 제목이 된 표현, '토끼굴(rabbit hole)'이 있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조끼 입은 토끼를 쫓아 굴로 뛰어들면서 모든 모험이 시작되죠.
여기서 '토끼굴에 빠진다'는 말은, 한번 들어가면 헤어나기 어려운 깊고 신기한 세계로 빠져든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습니다.

이미지 세 개가 굴 세 개가 됐다

게임에는 굴이 세 종류 있어요.
그런데 이 셋은 색만 바꾼 게 아니라, 각각 다른 토끼 이미지에서 출발했습니다.

흙굴은 앞에서 본 진짜 토끼의 굴이에요.
따뜻한 밀크초콜릿색 흙, 나무뿌리, 버섯, 반딧불이.
유럽 굴토끼가 파는 워런에 가장 가까운 굴이고, 그래서 기본 굴로 삼았습니다.
특별한 보정 없이 이 게임의 기준이 되는 곳이에요.

밤하늘 달빛 굴은 달토끼에서 나왔어요.
벽에 별이 박혀 반짝이고, 가끔 초승달 조각이 보입니다.
굴속인데 밤하늘 같은 게 앞뒤가 안 맞아 보이지만, 애초에 달에 토끼가 산다는 상상 자체가 그런 종류의 비약이니까요.

여기서 재밌는 건 이 굴만 중력이 약하다는 점이에요.
점프하면 둥실 뜨고 천천히 내려옵니다.
달의 중력이 약하다는 상식을 그대로 게임 규칙으로 옮긴 건데, 덕분에 이 굴은 보기만 다른 게 아니라 다르게 조작되는 굴이 됐어요.
설정에서 규칙이 나온 드문 경우입니다.

수정 동굴은 앨리스 쪽에 가까워요.
현실의 토끼 굴이 아니라, 굴로 뛰어들었더니 나오는 이상한 세계.
보라색 벽에 수정이 솟아 있고 보석이 굴러다닙니다.
진행이 빠르고 장애물이 조밀한 것도 "여긴 좀 이상한 곳"이라는 인상과 맞췄어요.

끝이 없는 굴

세계관도 앨리스 쪽에서 가져왔습니다.
모카는 할아버지의 가방에서 끝이 그려지지 않은 보물지도와 멈춘 회중시계를 발견해요.
지도에 끝이 없는 건 이 게임에 끝이 없기 때문이고, 시계가 멈춘 건 앨리스의 조끼 입은 토끼가 늘 시계를 들고 다니던 것에 대한 답례예요.

게임 안에서 회중시계를 먹으면 시간이 느려지는 것도 여기서 나왔어요.
멈춘 시계를 가진 토끼라면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거든요.
아이템의 효과를 정할 때 "무엇이 편리한가"보다 "무엇이 이 이야기에 맞나"를 먼저 물으면, 설명하지 않아도 납득되는 규칙이 나옵니다.

모카와 함께 내려가는 이 굴도 꼭 그래요.
한 발 들이면, 끝이 어디인지 보고 싶어지는 굴이니까요.

달토끼는 인도에서 출발했다

달에 토끼가 산다는 이야기의 오래된 갈래 하나는 인도의 설화에서 시작해요.
토끼와 원숭이와 여우가 굶주린 노인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원숭이는 과일을 따오고 여우는 물고기를 잡아 왔는데, 토끼는 가져올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불을 피우게 하고 자기 몸을 던집니다.
노인의 정체는 신이었고, 그는 토끼의 행동을 잊지 않도록 그 모습을 달에 새겼다고 해요.

이 이야기가 불교와 함께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각 지역의 달토끼가 됐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토끼가 무엇을 찧고 있느냐가 지역마다 다르다는 점이에요.

중국에서 옥토끼는 달에 사는 항아 곁에서 불사약을 찧습니다.
일본에서는 같은 자세로 떡을 찧어요.
한국에서는 방아를 찧는 모습으로 전해지는데, 무엇을 찧는지는 이야기에 따라 갈립니다.
같은 그림자를 보고 어떤 곳은 신선의 약을, 어떤 곳은 먹을 것을 떠올린 거예요.

십이지에도 토끼가 있는데, 여기서도 갈라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십이지에는 토끼 자리에 고양이가 들어가요.
열두 동물 중 이 자리만 나라마다 다른데, 한자음이 비슷해 옮겨졌다는 설명이 흔히 붙습니다.

알을 낳는 토끼

부활절 토끼는 더 이상한 조합이에요.
토끼가 알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니까요.

이 풍습의 기록은 독일어권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오스터하제(Osterhase)', 즉 부활절 토끼가 착한 아이들에게 색칠한 알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예요.
아이들이 둥지를 만들어 두면 밤새 토끼가 다녀간다는 식이었습니다.
18세기에 독일계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이 풍습도 함께 옮겨갔고, 지금의 부활절 토끼가 됐어요.

토끼와 알이 어떻게 한 자리에 오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둘 다 봄과 다산을 뜻하는 상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봄에 눈에 띄게 늘어나는 동물과, 새 생명의 상징인 알이 같은 계절 축제에서 만난 셈이에요.

'토끼굴에 빠진다'는 말의 이력

앨리스가 굴로 뛰어든 건 1865년 출간된 소설에서예요.
그런데 '토끼굴에 빠지다(going down the rabbit hole)'가 지금과 같은 관용구로 널리 쓰이게 된 건 훨씬 나중입니다.

처음에는 소설 그대로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었어요.
그러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의미가 한 번 더 굴절됩니다.
링크를 타고 링크를 타다 세 시간이 지나 있는 경험 — 위키백과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주제에 도착해 있는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됐어요.
나쁜 뜻만은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깊이 빠져드는 재미를 인정하는 표현에 가까워요.

이 게임의 제목을 정할 때 노린 것도 그 이중성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래로 파고드는 게임이면서, 한 판만 하려다 계속하게 되는 종류의 게임이길 바랐거든요.

신화 중에 달만 규칙이 됐다

앞서 굴 세 종류가 각각 다른 토끼 이미지에서 나왔다고 썼는데, 여기서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세 굴 중 밤하늘 달빛 굴만 게임 규칙까지 바꿨어요. 중력이 약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만 고른 건 아니고, 나머지 둘에는 옮길 규칙이 없었어요.
흙굴은 실제 토끼의 굴이라 특별한 물리가 없고, 앨리스의 세계는 이상하긴 해도 "어떻게 이상한지"가 규칙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정 동굴은 속도와 밀도라는 난이도 손잡이만 돌렸어요.

반면 달은 달랐습니다.
"달의 중력은 약하다"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게 곧바로 조작 감각으로 번역됩니다.
설정에서 규칙이 나온 게 아니라, 규칙으로 옮길 수 있는 설정이 하나뿐이었던 셈이에요.

그리고 그 결과가 가장 좋았습니다.
달빛 굴이 다른 두 굴보다 인상에 남는 건 벽에 별이 박혀서가 아니라 점프가 다르게 느껴져서예요.
세계관을 잘 만드는 것과 세계관이 손끝에 닿게 만드는 건 다른 일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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