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4·Sanchez

토끼는 왜 굴을 팔까 — 그리고 그 굴을 게임에 어떻게 옮겼나

모카가 끝없이 굴을 파고 내려가는 건 순전한 상상만은 아니에요.
실제로 땅을 파고 그 속에서 사는 토끼가 있거든요.
바로 유럽 굴토끼입니다.
우리가 기르는 집토끼의 조상이기도 하죠.

토끼 굴 '워런'의 단면

이들이 파는 굴은 단순한 구멍이 아니라, 여러 입구와 통로가 거미줄처럼 이어진 지하 도시에 가까워요.
영어로는 이런 굴 전체를 '워런(warren)'이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는 잠자는 방과 새끼를 키우는 방이 따로 있고, 위험이 닥치면 여러 출구로 흩어져 달아날 수 있게 설계돼 있어요.

굴은 토끼에게 집이자 피난처예요.
땅 위에는 토끼를 노리는 포식자가 많지만, 좁은 굴속까지 쫓아 들어오긴 어렵습니다.
한여름 더위와 한겨울 추위를 피하기에도 땅속이 훨씬 안정적이고요.

재미있는 건 모든 토끼가 굴을 파지는 않는다는 점이에요.
북미의 솜꼬리토끼처럼 직접 파기보다 풀숲이나 남이 쓰던 구멍에 몸을 숨기는 종도 많습니다.
부지런히 땅을 파는 건 굴토끼 쪽의 특기인 셈이죠.

갈래길을 버린 이유

여기서부터는 이 굴을 게임으로 옮기며 한 선택들이에요.

가장 먼저 포기한 게 워런의 특징인 갈래길이었습니다.
실제 굴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방으로 이어지는데, 그대로 만들면 러너가 아니라 미로 게임이 돼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플레이어는 "어느 쪽이 맞나"를 고민해야 하고, 그러는 사이 속도감이 죽습니다.
이 게임이 파는 건 빠르게 반응하는 재미라서, 길은 하나로 고정했어요.

대신 굴이 좌우로 계속 휘게 만들었습니다.
갈래가 없어도 곧지 않으면 사람이 판 굴처럼 보이거든요.
자를 대고 뚫은 파이프와 손으로 파 내려간 굴의 차이는 결국 그 불규칙함이에요.
이 곡선은 미리 그려둔 게 아니라 사인파 몇 개를 겹쳐 만들어서, 아무리 내려가도 같은 모양이 반복되지 않아요.

둥근 굴이라서 생긴 것

굴이 둥글다는 점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써먹었어요.
보통의 러너는 바닥을 달리면서 좌우 세 칸쯤을 오가는데, 여기서는 모카가 터널 둘레 어디든 달릴 수 있습니다.
천장 쪽으로 붙어서 달려도 되고요.

이건 그냥 멋 부린 게 아니라, 둥근 굴이라는 설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온 결과예요.
그리고 이동 가능한 공간이 선이 아니라 원이 되니, 장애물을 배치할 수 있는 방식도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흙 속의 것들

실제 굴은 흙을 파고 들어가니 나무뿌리를 만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뿌리를 대표 장애물로 삼았습니다.
뿌리는 터널 둘레를 가로지르는 호 모양이라 옆으로는 못 피하고 뛰어넘어야 하는데, 이 "옆으로 못 피한다"는 성질이 바위와 다른 종류의 판단을 만들어줘요.

벽에 흩뿌린 것들도 같은 생각에서 나왔어요.
돌멩이, 어두운 흙 패치, 버섯, 반딧불이가 구간마다 다르게 배치됩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터널이 매끈한 원통으로 보여서, 파낸 굴이 아니라 압출한 관처럼 느껴지거든요.
게임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장식이지만, "여기가 흙 속"이라고 말해주는 건 결국 이런 것들이에요.

모카는 아무래도 그 부지런한 핏줄을 물려받은 모양이에요.
다만 그 굴은 실제 워런보다 훨씬 단순하고, 훨씬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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