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는 왜 굴을 팔까 — 그리고 그 굴을 게임에 어떻게 옮겼나
모카가 끝없이 굴을 파고 내려가는 건 순전한 상상만은 아니에요.
실제로 땅을 파고 그 속에서 사는 토끼가 있거든요.
바로 유럽 굴토끼입니다.
우리가 기르는 집토끼의 조상이기도 하죠.

이들이 파는 굴은 단순한 구멍이 아니라, 여러 입구와 통로가 거미줄처럼 이어진 지하 도시에 가까워요.
영어로는 이런 굴 전체를 '워런(warren)'이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는 잠자는 방과 새끼를 키우는 방이 따로 있고, 위험이 닥치면 여러 출구로 흩어져 달아날 수 있게 설계돼 있어요.
굴은 토끼에게 집이자 피난처예요.
땅 위에는 토끼를 노리는 포식자가 많지만, 좁은 굴속까지 쫓아 들어오긴 어렵습니다.
한여름 더위와 한겨울 추위를 피하기에도 땅속이 훨씬 안정적이고요.
재미있는 건 모든 토끼가 굴을 파지는 않는다는 점이에요.
북미의 솜꼬리토끼처럼 직접 파기보다 풀숲이나 남이 쓰던 구멍에 몸을 숨기는 종도 많습니다.
부지런히 땅을 파는 건 굴토끼 쪽의 특기인 셈이죠.
갈래길을 버린 이유
여기서부터는 이 굴을 게임으로 옮기며 한 선택들이에요.
가장 먼저 포기한 게 워런의 특징인 갈래길이었습니다.
실제 굴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방으로 이어지는데, 그대로 만들면 러너가 아니라 미로 게임이 돼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플레이어는 "어느 쪽이 맞나"를 고민해야 하고, 그러는 사이 속도감이 죽습니다.
이 게임이 파는 건 빠르게 반응하는 재미라서, 길은 하나로 고정했어요.
대신 굴이 좌우로 계속 휘게 만들었습니다.
갈래가 없어도 곧지 않으면 사람이 판 굴처럼 보이거든요.
자를 대고 뚫은 파이프와 손으로 파 내려간 굴의 차이는 결국 그 불규칙함이에요.
이 곡선은 미리 그려둔 게 아니라 사인파 몇 개를 겹쳐 만들어서, 아무리 내려가도 같은 모양이 반복되지 않아요.
둥근 굴이라서 생긴 것
굴이 둥글다는 점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써먹었어요.
보통의 러너는 바닥을 달리면서 좌우 세 칸쯤을 오가는데, 여기서는 모카가 터널 둘레 어디든 달릴 수 있습니다.
천장 쪽으로 붙어서 달려도 되고요.
이건 그냥 멋 부린 게 아니라, 둥근 굴이라는 설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온 결과예요.
그리고 이동 가능한 공간이 선이 아니라 원이 되니, 장애물을 배치할 수 있는 방식도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흙 속의 것들
실제 굴은 흙을 파고 들어가니 나무뿌리를 만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뿌리를 대표 장애물로 삼았습니다.
뿌리는 터널 둘레를 가로지르는 호 모양이라 옆으로는 못 피하고 뛰어넘어야 하는데, 이 "옆으로 못 피한다"는 성질이 바위와 다른 종류의 판단을 만들어줘요.
벽에 흩뿌린 것들도 같은 생각에서 나왔어요.
돌멩이, 어두운 흙 패치, 버섯, 반딧불이가 구간마다 다르게 배치됩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터널이 매끈한 원통으로 보여서, 파낸 굴이 아니라 압출한 관처럼 느껴지거든요.
게임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장식이지만, "여기가 흙 속"이라고 말해주는 건 결국 이런 것들이에요.
모카는 아무래도 그 부지런한 핏줄을 물려받은 모양이에요.
다만 그 굴은 실제 워런보다 훨씬 단순하고, 훨씬 깊습니다.
워런 안에는 이름 붙은 구멍들이 있다
워런의 구멍이 다 같은 구멍은 아니에요.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비스듬히 파 내려간 큰 입구는 토끼가 굴을 만들 때 흙을 밖으로 밀어낸 자리예요.
그래서 입구 앞에 흙무더기가 쌓여 있습니다.
반대로 안쪽에서 위로 뚫어 만든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건 흙무더기 없이 땅에 구멍만 뻥 뚫려 있어요.
급할 때 튀어나가는 비상구에 가깝습니다.
포식자가 큰 입구를 지키고 있어도 이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죠.
새끼를 기르는 방은 아예 본체와 떨어진 짧은 굴에 따로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미가 드나든 뒤 입구를 흙으로 막아두기도 해요.
굴 안에 있는 다른 토끼들로부터도 새끼를 떼어놓는 셈입니다.
굴을 파는 습성과 무리 생활은 서로 붙어 있어요.
큰 워런은 한 마리가 만든 게 아니라 여러 세대가 이어 파 내려간 결과고, 그 안에서 순위가 생깁니다.
좋은 자리 — 깊고 안전한 안쪽 방 — 는 서열이 높은 개체가 차지해요.
혼자 사는 솜꼬리토끼가 굴을 파지 않는 것과 굴토끼가 무리를 이루는 것은 같은 이야기의 앞뒤입니다.
곡선은 여섯 조각으로 만들어진다
굴이 계속 휘어 보이지만, 실제로 화면에 존재하는 벽은 여섯 조각뿐이에요.
한 조각이 30m니까 눈앞에 펼쳐진 굴은 항상 180m 길이입니다.
모카가 한 조각만큼 내려가면 가장 뒤의 조각이 맨 앞으로 옮겨가 새 지형으로 다시 그려져요.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리는 셈입니다.
그래서 굴이 아무리 깊어져도 메모리에 쌓이는 게 없습니다.
1,000m를 내려가든 10,000m를 내려가든 벽 조각은 여섯 개예요.
곡선 자체는 미리 그려둔 경로가 아니라 사인파를 몇 개 겹쳐 만듭니다.
주기가 서로 다른 파동을 더하면 반복 주기가 아주 길어져서, 사람이 플레이하는 동안에는 같은 모양이 다시 나오지 않아요.
지형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고도 "매번 다른 굴"이 되는 이유입니다.
여기에 곡률 상한이 있어요.
너무 급하게 휘면 180m 앞의 출구가 화면 밖으로 밀려나 벽만 보이게 됩니다.
굴처럼 보이려면 휘어야 하지만, 너무 휘면 앞이 안 보여서 게임이 안 되죠.
지금의 진폭과 파장은 그 사이에서 찾은 값입니다.
한 바퀴 도는 데 2초
둥근 굴을 쓰기로 한 순간 따라온 숫자가 하나 있어요.
모카가 벽을 도는 최고 각속도는 초당 3.2라디안입니다.
한 바퀴가 6.28라디안이니, 전속력으로 돌면 약 2초에 터널을 한 바퀴 돕니다.
이 값이 게임의 성격을 꽤 많이 정합니다.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데 1초쯤 걸린다는 뜻이니까요.
콤보 유지 시간이 2초인 것과 겹쳐 보면, 터널 반대편의 당근을 노리는 건 산술적으로 아슬아슬한 선택이 됩니다.
옆으로 세 칸 움직이는 보통의 러너였다면 나오지 않았을 종류의 판단이에요.
가속과 감쇠도 붙어 있습니다.
키를 누르면 즉시 최고 속도가 되는 게 아니라 초당 14라디안씩 붙고, 손을 떼면 서서히 멈춰요.
그래서 방향을 두 번 바꾸면 늦는 겁니다 — 반대로 돌리려면 먼저 지금의 회전을 죽여야 하니까요.
벽에 붙은 것들은 전부 장식이다
돌멩이, 흙 패치, 버섯, 반딧불이는 충돌 판정이 없어요.
지나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순전히 "여기가 흙 속"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들이에요.
그런데 이 장식이 없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매끈한 원통은 속도감이 사라져요.
벽에 아무 무늬가 없으면 얼마나 빨리 내려가고 있는지 눈으로 알 수가 없거든요.
지나가는 물체가 있어야 흐름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장식인 동시에 속도계이기도 해요.
벽 자체의 분할도 여기 얽혀 있습니다.
원둘레를 48조각, 길이 방향을 24조각으로 나눠 그리는데, 처음에는 24와 12였어요.
조각이 적으면 명암의 경계가 부채꼴로 각져 보여서, 손으로 판 굴이 아니라 각진 파이프처럼 느껴졌습니다.
벽 여섯 조각만 관리하면 되니 정점 수가 서너 배 늘어도 비용에 여유가 있었고, 그래서 늘렸어요.
앞서 버린 갈래길만큼이나, 이런 값 하나가 "굴처럼 보이는가"를 정합니다.